나의 이야기

새와의 인연

구정(鷗汀) 2010. 1. 25. 21:46

  < 새와의 인연 1 >

 

눈 덮인 왕벗꽃나무위의 새 모이집

 


지난 겨울의 새집

 

 

 매화나무에 걸린 새 모이집

 

 

최근작품 - 개량형 새 모이집 (new bird feeder house)

 

 

최근작품 - 모이집(bird feeder or bird table -좌)과   새집(bird house-우)

 

 

 

 

 

 

오래 전 성남의 아파트에서 살았을 때의 일이다.

 

생활에 조금은 여유가 생겨 새집(new house)을 준비 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마침 아파트를 지어 분양 한지 한달쯤 된다는 주공 아파트 단지를 분양이 늦어져 이제 가 보아도 제법 남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구경삼아 가 보게 되었다.  

도착해 보니 예상과는 달리 벌써 거의 다 나가고 몇 채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이마져도 며칠 후면  전부 분양될 것 같다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 즉석에서 가게수표를 끊어 계약금을 지불하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이 아파트 1층을 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로얄층” 그런 게 못되어 조금 아쉬운 마음 이었지만 나름대로 이 아파트 단지는 녹지가 많아서 환경이 좋은데다가 1층 앞 화단에는 꽃도 좀 심을 수가 있고 화분도 내 놓을 수 있는 너른 공간이 있어 아내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하며 위안을 삼기도 했는데 아무튼 이곳에 살면서 지낸 몇 년이 전원주택에 대한 꿈을 처음으로 키워가고 새와의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사를 하여 새로운 환경에 만족하고 살던 중 이웃에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하신 교장선생님 내외분이 사셨는데 이분들이 양평에 전원주택을 마련해 이사 가시게 되어 격려차 방문하여 즉석구이 군고구마와 맛있는 삼겹살 구이 대접을 받기도 했다.

가까이 지냈던 다른 한분도  청평 근처에 새집을 짓게 되어 놀러가 보기도 했는데 이후 그 분 들로부터 전원생활의 재미를 하나씩 익혀가며 자연스레 시골생활을 접하게 되었고 급기야 “우리도-” 하고 시간이 되면 마음에 드는 곳을 알아 봐야지 생각 했지만 그게 그렇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바로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고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  판교가 처음 개발 되던 때가 아니었나 기억 되는데 얼마 전과 비교해 엄청나게 오른 땅값을 보면 전원주택 이고 뭐고 감히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지만 마치 보자기에 쌓여있는 서울이 그 보자기로 싼 틈으로 자꾸 삐져나오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업무상 자주 다녀본 일본의 동경도(東京都)가 도심엔 업무시설이 주로 생기고 시내에서 한 두시간 정도 걸리는 지역이 공기 좋고 살기 좋은 깨끗한 전원주택지로 개발 되어가며 발전했던 걸로 보아 우리도 분명히 이와 비슷한 형태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 바로 생각했던 바를 실천으로 옮길 때라고 생각하여 책도 사보며 이런 저런 정보를 모아 갔다. 그러나 집을 산지 얼마 안 되어 여유 자금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허가 또한  까다롭다고 하여 가능하면 시골에 있는 허름한 초가집을 싸게 사서 골조는 그대로 두고 부엌을 포함해서 일부를 수리해서 직장에 다닐 때 까지는 주말농장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직장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장소는 서울에서 너무 먼 곳은 피하기로 하는 등 이곳에 살면서  하나씩 둘씩 정리해 몇 년 후엔 거의 윤곽이 잡혀져 가고 있었다.

 

어찌 되었던 공기 좋고 맑은 곳에서 살게된 기쁨에 아침이나 휴일에 남한산성으로  산책을 다니기도 하면서 즐겁게 생활 하던 중 어느 날 아내가 아파트 주위에 날아다니는 비둘기가 있어 쌀을 좀 주어보니 기특하게도 때를 맞추어 와서 기다린다고 하면서 퇴근 할 때 내가 다니는 백화점에서 새 모이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여 보리쌀과 콩을 조금씩 사다 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 쉬는 날이 되어 아내가 늘 하는 방식대로 먹이를 섞어 뿌려놓고 잠시 기다려보니 아! 진짜로 비둘기 세 마리(한 가족인 듯 두 놈은 크고 한 놈은 새끼였던 걸로 기억)가 와서 모이를 먹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앙징맞게 보였던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며 며칠인가 시간이 지나니 이 세 녀석이 친구들을 데려오고 친구가 또 친구를, 이어서 사돈에 팔촌까지 데려오는지 그 수가 점차 늘어나자 우리도 경제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하고 그때만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던 정미소에서 콩을 골라 낼 때 나오는 벌레가 먹거나 작아서 상품성이 떨어지는 콩이나 팥, 겉보리등을 두어되씩 사다가 섞어서 하루에 한 번씩 모이를 주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아파트 1층 밖의 화단에는 꽃과 잡초, 잔디가 빽빽하게 함께 어우러져 자라고 있는데 이곳에 모이를 뿌려 주어도 이 녀석들이 와서 정신없이 먹고 간 후에 자세히 살펴보면 콩 한 톨 남김없이 알뜰하게 다 찾아 먹고 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먹이가 부족해서 그러려니 해서  측은한 마음에 좀더 많이도 주어 보았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잘 보이지도 않는 풀 속에 있는 모이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찾아 먹는지 자기들만의 독특한 비법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 이었다. 종류도 비둘기에서 까치, 그리고 이름모를 작은 새들로 점차 늘어 수십마리가 되어 갔지만 집단으로 생활하는 습성을 가진 비둘기의 텃세에 눌려 다른 녀석들은 겨우 몇 톨씩 얻어먹고 갈뿐 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우리의 “새 모이 주기 행사”는 점차 즐겁고 재미있는 하루의 일과가 되어갔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이 행복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비둘기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고 콩과 겉보리 두어되면 한달 가까이 먹던 모이가 점차 서너되, 너덧되로 늘어갈 무렵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근 거리는 소리가 우리의 귀에도 들려오기 시작하였고 아파트 부녀회에서도 새 때문에 더러워서 못 견디겠다고 모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등의 의견이 있었다는 소리가 한다리 건너 전해오기 시작했다. 사실은 우리가 그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바람에 이리 저리 날려서 청소하기도 어려운  지저분한 깃털이며 이 녀석들이 실례를 해 놓은 분뇨는 새를 귀여워하는 우리의 눈도 찌푸려 지지 않을수 없을 정도 인것이 분명한지라  스스로 조금씩 모이의 양을 조금씩 줄이기에 이르렀고 이에 맞추어 새들의 숫자도 점차 줄어들게 되면서 급기야는 모이를 안주니 찾아오지 않게 되어 버렸다.

 

비둘기가 안 오게 되고부터는 우리의 잔 재미도 없어져 버렸고 이 아파트의 생활 또한 점차 재미없게 느껴져 갔다.

꼭 새 때문 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럴 바에야 새와 함께 있어도 문제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좋고 너른 곳에서 잔디심고 정원 가꾸며 살고싶은 우리의 계획을 앞당겨 실천하기로 아내와 의견이 일치하여 그동안 준비만 해오던  전원생활을 위한 시골집을 찾아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행동에 나섰다고 해서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조건을 갖춘 적절한 장소가 바로 구해 지는것이 아니었음은 그 후에 알게된 또 하나의 소중한 경험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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